제주 여행기 - 둘째 날 : 위미리, 산방산, 협재... 난 누구 여긴 어디
누군가와 여행을 떠날때 보통은 내가 여행 일정을 주도하는 편이지만, 지난달 제주여행은 제주에 있는 선배만 믿고 출발 전날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어 떠났다. 몸과 마음이 복잡하여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제주에 도착하여 돌아다녔는데, 평소와는 달리 머리를 비우고 그저 따라다니기만 하니 너무나 편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패키지 여행을 가는 거구나!) 그래서 둘째날도 선배가 가자는대로 따라다닐 생각이었다. 하지만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두둥.
호텔에서 나와 아침을 먹기 위해 스타벅스로 슬렁슬렁 걸어가는 길까지는 순조로웠다.
스타벅스로 가는 사이 잠시 들린 서귀포시 중앙도서관. 규모는 아담했지만, 무려 창가에서 바다가 보이는 멋진 도서관이었다. 세상에, 바다가 보이는 도서관이라니, 나에겐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나 만화의 배경처럼 느껴지는 장소였다. 그리고 잠시 서가를 누비는 사이 읽고 싶은 책이 많이 보여서, 오늘은 그냥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을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했다. (제주에 길게 묵는 날이 온다면 언젠가 한번은...^^)
드디어 도착한 스타벅스 서귀포DT점.
제주 스벅에서만 판다는 당근 현무암 케이크를 아침 식사로 먹었다. 엄청 귀여웠고 (스벅 케이크치고는) 맛도 괜찮았음!!
하.지.만...
아침부터 영 좋지 않았던 선배의 컨디션이 점점 더 나빠져 결국 선배는 호텔로 돌아가고, 갑자기 나 혼자 돌아 다니게 되었다. 나홀로 여행은 자주 다니니 혼자 다니는 것 자체는 상관없는데, 문제는 어디에 갈지 뭘 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점.
의욕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를 그냥 날리기는 뭐해서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을 급히 검색하다 일단 위미리에 수국을 보러가기로 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릴때 버스기사 아저씨가 어딜 가냐고 하셔서 수국 보러 간댔더니 "응? 수국 아직 별로 안피었는데..."라며 애잔한 표정으로 쳐다보시는 거다.
그래서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날의 위미리 수국의 개화상태는...
그냥 이 정도. 도대체 뭣땜에 여기까지 왔나 싶었지만 그래도 붐비지 않아 사진 찍기 수월했던 것은 나름 장점. 위미리에 들렸다가 근처 휴애리 수국도 보러 갈까 했는데 아무래도 개화 상태는 비슷할 것 같아 패스하고, 그냥 호텔과 가까운 서귀포의 바다 보이는 카페에 가서 뒹굴거리다 일찍 호텔에 들어갈 생각으로 버스를 탔는데-
이러저러한 일들로 인해 개미새끼 한마리 안보이는 산방산 근처 제주조각공원 앞에 내리게 되었다... 이 "이러저러한 일들"은 제주도의 (아직도) 미흡한 대중교통시스템과 나의 버스바보 기질 그리고 중간의 급일정변경 및 오지랍 버스 기사 아저씨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이에 대해 구구절절히 쓰기도 했었는데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라 그냥 삭제ㅋ
배가 고프기도 하고 사람이 단 한명도 안보이니 뭔가 불안해져서, "사람의 기척과 먹을 것"을 찾아 버스정류장 건너편 웬드구니 카페로!
브런치&베이커리 카페라 쓰여있었는데 요즘은 브런치는 안하신다고... 어쩔 수 없이 블루베리케이크와 레인보우비엔나커피를 주문했다. 아침도 케익이었는데 점심도 케익... 내가 아무리 단걸 좋아해도 이건 좀 ㅠㅠ
그래도 주인 아저씨가 엄청 친절하시고 블루베리 케이크 접시에 데코도 예쁘게 해주셔서 좋았음. 산방산을 바라보며 한참 쉬다가 밖으로 나와 길을 찾았는데,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아무래도 여긴 사람이 걸어갈 길은 아닌 것 같아, (여차하단 로드킬 당할 듯 ㄷㄷ)
웬드구니 주변 동네를 방황하다 귀여운 고양이도 보긴 했지만... 결국은 도보로 사계바다에 가는 것은 포기하고 아까 내렸던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버스를 탔다. 이때의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닷가인 협재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한번에 가는 곳이기도 했고.
길고 긴 버스 탑승 끝에 도착한 협재 해수욕장. 그런데 이미 오후 5시가 되어가는 시간이라, 바다색이 별로 예쁘지 않고...
협재에서 금능 해수욕장 쪽으로 걷는데 감흥도 없고 지치기만 하고 도대체 여기까지 왜 온걸까 오늘은 왜 이리 꼬인걸까 생각하다 밥이나 먹으러 가기로 했다.
해산물 종류가 먹고 싶었는데, 혼밥을 해야 하다보니 아무데나 들어가긴 뭐해서 주변을 방황하다가 발견한 곳,
한림로 342 쩜빵!
아기자기 예쁘게 꾸며져 있길래 들어갔는데, 다행히 이곳은 혼밥 하기에 상당히 적절한 가게였다. (물론 여럿이 와도 좋은 가게^^) 리뷰를 별도로 올릴 예정인데, 실내도 완전 내 취향의 가게라 마음에 쏙 들었다.
내가 고른 음식은 딱새우마요볶음밥.
드디어 처음으로 먹는 제대로 된 음식! 흑흑흑.
가게가 마음에 들어, 맥주도 마시며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서귀포까지 갈 길이 워낙 멀다보니, 아쉬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서야했다.
버스 시간까지 약간의여유가 있길래 협재 바다를 다시 보러갔는데, 밥을 먹고 나니 그제서야 바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구나 ㅠㅠ
협재에서 버스를 탔다가 한경면사무소 정류장에서 갈아타야 했는데, 한경면사무소에서도 20분 정도 대기 시간이 남아, 잠시 바다쪽으로 걸어보았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시골길을 걷는데,
주택과 밭 사이에서 갑자기 마법같이 나타난 이 가게, 미레이나 : )
너무 예뻐서 잠시 음료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완전히 깜깜해지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야할 것 같아 그냥 지나치고, 바다 쪽을 향해 좀 더 걸었다.
그리하여, 마주한 한경면 신창리 한경해안로의 노을.
바람과, 파도소리와, 풍력발전기와, 새소리와, 노을, 그리고 이 곳엔 오로지 나 혼자.
사진으로 보면 평범해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참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어쩌면 버스를 잘못 타서 망쳐버린 하루에 대한 보상심리로, 과한 감동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ㅎㅎ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숙소와 가까운 광대왓 정류장에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긴 하루가 - 다 합쳐 버스만 다섯시간 이상 탄 듯 ㅠㅠ - 지나갔다.
애초 생각대로, 서귀포나 사계 쪽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뒹굴뒹굴거리며 쉬다 왔으면 참으로 좋았으련만....딱히 새로운 곳에 간 것도 없고(위미리 산방산 협재 다 예전에 간 곳들) 그렇다고 제대로 쉰 것도 아니고, 맛있는 걸 많이 먹은 것도 아니고, 멘붕의 도가니, 그저 실패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하루였지만 그래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제주도니까, 이런 추억도 나쁘지 않을거라고 애써 위안해본다. 이렇게 제주여행 두번째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