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lust
여행과 현실 - 암스테르담행 항공권 결정 고군분투기 본문
원래 비엔나로 떠나려고 했었던 지난주 수요일부터 지금까지, 평소보다 시간이 훨씬 더디게 가는 느낌이다.
몇번이고 "(예정대로 갔더라면) 아직도 비엔나/부다페스트 여행 중이네? 시간이 정말 느리다"란 생각을 했다. 거기에 답답하고 우울한 기분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서 그냥 만사 제쳐두고 떠날 걸 그랬나,라는 후회도 든다.
요 며칠 사이 다시 8월말에 떠나는 비행기표와 호텔을 알아보는 중이다.
암스테르담 대신 에딘버러에 갈까, 혹은 좀 바쁘겠지만 암스테르담, 에딘버러 두 곳 다 갈까
아님 아예 루마니아에 갈까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이번엔 그냥 암스테르담만 가는 것으로 결정"했는데,
결정을 내리고나니 내가 찍어두었던 91만원짜리 비행기표가 마감. 하... 귀신같은 타이밍.
그래서 다시 103만원짜리 카타르 항공을 찾아두긴 했는데, 밤비행기 타고 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격렬한 피곤함이 몸과 마음을 뒤덮는다.
4년전만 해도 시간 없는 직장인의 구원처럼 여겨졌던 장거리 밤비행기가 이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출근해서 하루종일 빡세게 일하다, 지친 몸을 내 방 침대에 뉘이는 대신 불편하고 좁은 비행기 좌석 위에서 쪽잠을 청하는 일, 몇번 하고 나니 더이상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 나에게 125만원짜리 대한항공 직항편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아무래도 국적기 비행 스케쥴이 가장 부담이 적기도 하고, 내가 보통 여행가는 도시들은 직항편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나마 국적기 직항편이 운행하는 도시에 갈때 직항편을 타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러다 해보았다, 비즈니스 클래스 검색.
나온다, 터키항공, 180만원! 사실 다른때였으면 터키항공 비즈니스 좌석을 덥썩 물었을텐데 요즘같이 수상한 시절에 굳이 터키를 경유하고 싶지는 않고, 대신 루프트한자 비즈니스 클래스가 233만원 정도. 성수기 끄트머리 항공권을 2~3주 전에 예약하는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 기분도 많이 꿀꿀한데 비즈니스를 탈까 싶어 솔깃. 아니 근데 기왕 비즈니스 탈꺼면 에미레이트 항공 A380 비즈니스가 훨씬 좋잖아! 라는 생각에 검색해보니 에미레이트 비즈니스는 255만원. 계속 치솟는 예산. 그래도 기왕 탈거면 에미레이트 비즈니스가 백배 낫지.
이코노미석에 갇혀 장거리 가는 거 정말 지긋지긋하니 고생하지 말고 비즈니스 타고가자!라는 뽐뿌가 강렬히 찾아왔으나, 그와 동시에 내 머리속엔 비행 20시간 정도 편하자고 비즈니스로 발권하느니, 차라리 항공료 차액으로 암스테르담의 좋은 호텔을 예약하여 8박 동안 편히 지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 180도로 누워간다고 해서 잠을 잘자는 것도 아니다. 작년 9월에 핀란드 갈때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돼서 다리 쭉 뻗고 포근한 이불 덮고 편히 누워 갔지만 결국 잠은 1도 못잤음;)
암스테르담 역시 비싸디 비싼 숙박비로 유명한 곳이다. 또 나는 8박이나 되는 기간을 2~3주 전에 예약하다보니 선택 옵션이 많지도 않아서, 중앙역이나 뮤지엄 지구 쪽은 애저녁에 포기하고, 암스테르담 외곽의 깔끔한 4성급 호텔을 예약할 요량이었다. 그 외곽 호텔 8박의 가격은 대략 100만원 정도인데 막상 또 예약하려고 하니 그래도 뮤지엄 카드 만들어서 박물관 열심히 다니고 콘세르트 헤바우 공연을 여러번 보려면 뮤지엄 지구 쪽에 호텔을 잡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 망설이던 찰나였다. 하지만 뮤지엄 지구에서 깔끔한 4성급 호텔을 잡으려면 적어도 8박 예산이 180만원 정도로 올라가는 거다. 아아아....
결국 나의 머리는 터질 정도로 복잡해져서, 피곤한 장거리 비행도 싫고, 작고 꾸진 호텔도 싫으니, 차라리 암스테르담 갈 돈으로 가까운 동남아에 가서, 호화로운 호텔에서 푹 쉬다 오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비즈니스 항공 + 외곽 4성급 호텔 / 비즈니스 항공 + 중심가 3성급 호텔 / 등의 조합을 마구마구 생각해보지만 뭐 하나 마음에 쏙 드는 게 없다. 사실 비즈니스 타고 갈 바에야 그 돈으로 여행 한번 더 가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게 평소 나의 지론이지만, 정말 요즘은 왜 이렇게 피곤한지, 장거리 비행 끝에 현지에서 고생할 생각을 하면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뚝 사라진다. 그런 마음 때문에 비엔나도 포기한건데, 사실 날만 안덥다 뿐이지 암스테르담이라고 다를 게 뭔가. 머나먼 유럽인 건 마찬가지인데.
여행을 앞두고 계속 이렇게 피곤함이 앞서고, 심지어 위약금 물고 항공권을 취소하기까지 하는 걸 보면, 어쩌면 이젠 여행 패턴을 바꿀때가 온건지도 모른다. 일년에 세번 정도 가던 여행을 한번으로 압축시키고, 대신 그 돈으로 비즈니스 클래스와 좋은 호텔을 이용하는 것. 아무래도 그게 답인 걸까. (근데 일년 내내 여행 가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사는 내가 과연 1년에 한번 외국여행 가는 걸로 족할 수 있을까?)
당장 이번 여행은 어쩐다.
고민할때마다 싼 비행기표가 사라져서 이젠 더이상 미루기가 좀. 대한항공 직항편만 해도 지난주엔 120만원짜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125만원이 제일 싸다. 이러다 아무데도 못갈 것 같다.
Chet Baker - Let's get lost
나도 나의 이런 변화가 사실 좀 두렵다. 정말 덮어놓고 여행을 떠나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돈 생각을 먼저 하고, 피곤한 기분이 여행의 즐거움을 족족 압도해버린다. 사람은 모두 변하기 마련이지만... 하지만, 나에게서 여행을 빼면 대체 뭐가 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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