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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 없는 나날들 * 잡담 - 요크셔 골드 밀크티,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 이방인, 수플레, 꼴라쥬 파리 본문

Trivia : 일상의 조각들

의욕 없는 나날들 * 잡담 - 요크셔 골드 밀크티,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 이방인, 수플레, 꼴라쥬 파리

mooncake 2016. 10. 3. 19:50

(2016년 9월, 네덜란드 잔드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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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여행을 떠난다는 이미지가 주변인들에게 박혀 있어서인지, 이번 추석 연휴때 어디 안가냐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고, 나 네덜란드 다녀온지 일주일 밖에 안됐는데;;;라는 대답을 수십번은 했다. 또 이번 개천절 연휴 역시 의외라는 듯 "어, 여행 안갔어?"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지인들 말마따나 가까운 곳에 휘리릭 다녀올만도 했는데, 또 어딘가 갈 생각을 아예 안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전혀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아예 아무런 계획도 잡지 않았다.

그러면 이번 연휴처럼 시간 여유가 있을때 밀린 여행기 업데이트를 부지런히 하면 좋으련만, 블로그마저도 귀찮았다. 

여행을 간다거나 평소보다 좀 더 재밌고 다양한 활동을 하러 다니는 데엔 "시간, 체력, 의욕" 세 가지가 전부 필요한데, 평소의 나는 의욕만 충분했다면, 이번엔 시간도 있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은데, 의욕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정신없이 바빠지거나 몸이 많이 아파지면 분명 "지금 이 순간 놀러다니지 않고 시간을 의미없이 낭비한 것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할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손하나 까닥하기 싫을 정도로 모든 일이 다 귀찮았다.


결국 나는 내 개인휴가를 포함한 긴 연휴를 그냥 흘려보내버렸다.

나중엔 분명 후회하겠지만, 

살다보면 이럴때도 있는 거 아닐까... 

아무것도 하기 싫을땐 아무것도 안하는 게 정답 아닐까...

그런 생각들로 합리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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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의욕이 없었던 건 무엇보다도 기분이 많이 우울했던 탓이다.

뭐 언젠 안 우울했냐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ㅋ 지난주부터 지금까지 계속, 평소보다 훨씬 더 우울했다.

회사를 쉬고 장기 여행을 떠날까,라는 생각을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지나보니...

미쳐버릴 것 같아도 "회사를 그만두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질 때"가 그래도 훨씬 나은 경우이고

"회사를 그만둬도 어차피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을 때"야말로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

그게 가짜희망이든 진짜희망이든간에 상관없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니까.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도 행복해지기가 어려운 걸까.

따지고 보면 딱히 불행할 이유도 없는데, 왜 우울감에서 이토록 헤어나오기가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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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 내가 행복감을 느낀 순간이 있었으니...

오랜만에 테일러즈 오브 해로게이트의 요크셔 골드로 맛난 밀크티를 만들어 마셨다.


2013년 런던 여행을 가서 이 홍차를 사갖고 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밀크티를 만드는 데는 전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온갖 종류의 홍차로 밀크티를 시도해봤지만 하나같이 끔찍하게도 맛이 없어서 슬펐는데

요크셔 골드로 밀크티를 만들어 한 모금 맛본 순간, 나에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남들이 밀크티 용으로 요크셔 골드를 강추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근데 

참으로 이상한 건, 향긋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요크셔 골드 밀크티 하나로도 쉽사리 행복해지는 내가

왜 종종 우울감에 빠지는 걸까. 

내 감정은 종종 통제할 수 없는 괴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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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atia Buniatishvili plays Piano Concerto No. 2 by S. Rachmaninov


Filarmonica Teatro Regio Torino

Gianandrea Noseda, d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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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예전에 교보문고에서 공짜로 받은 eBook들을 뒤지다가 정말로 오랜만에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예전에 프랑스어를 배우던 시절 프랑스어판으로 읽고, 한국어판으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오래전에, 까뮈의 이방인은 어쩐지 내게 잘 와닿지 않는 소설이었다. 까뮈가 프랑스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할 때, "재미도 없고 무슨 소리 하려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 다시 읽는 이방인은 어떤 느낌일지 조금 궁금했다. 이해의 폭이 깊어졌을까?라는 기대 반, 건조하고 무덤덤한 주인공 뫼르소에게서 뭔가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 반으로 이방인을 읽었는데, 글쎄...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ㅠㅠ "부조리"나 "실존주의" 역시 나에게 쉽게 잡히는 개념이 아니며 "어휴 난 역시 인문계열 전공 안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싫어서가 아니라 재능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ㅋㅋ)

10년 뒤에 다시 한번 읽는다면 그땐 뭔가 좀 새롭게 느끼는 게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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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책을 두 권 선물 받았다. 정확히는 친구가, 회사에서 나오는 도서구입비가 남았는데 더이상 살 책이 없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친구가 사주는 책인데 취향에 안맞거나 마음에 안드는 책이면 안될 것 같아서, 예전에 재밌게 읽은 이기진의 꼴라쥬 파리와, 또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와 재밌게 읽다가 끝까지 못읽고 반납한 애슬리 페커의 수플레라는 소설 두 권을 골랐다.


친구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연간 1인당 도서구입비로 책정되는 금액이 상당한데, 어린이 책이나 실용서나 이북ebook은 살 수 없다고 한다. "진짜 책을 읽으라는" 회사 측의 배려 같지만 매일 야근하는 와중에 일년에 몇십만원어치 책을 읽을 수 있는 직장인이 얼마나 되겠나... 게다가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는 요즘 있던 책도 내다파는 형국에 종이책을 자꾸 늘리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인데 - 나도 종이책 쪽을 훨씬 좋아하지만 편의성 문제로 점점 더 ebook 구입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 여튼 배려나 지원이 강요처럼 느껴지는 이런 사원복지는 썩 옳지 않은 걸로. 그 덕에 나는 책을 두권 얻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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