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lust
일상잡담-삶의 방향성 본문
이 사진은 지난주 병가 기간 중 암검사를 받고 오던 날 찍었다. 몸은 안좋았지만 기분이 꿀렁꿀렁해서 커피가 몹시 땡겼다. 그래서 집 앞 카페에 들려 카푸치노와 쿠키를 주문해놓고 잠시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겼다가("환자의 사치") 카페가 너무 춥길래 곧 집에 돌아왔다.
그렇다고 내가 진짜 암일까봐 걱정한 건 아니였다. 의사선생님의 권고로 검사를 했지만, 혹시 설마?라는 마음은 0.5% 정도에 불과했고 99.5% 이상 암이 아닐거라 확신했다. 내 믿음의 강력한 근거는 내가 암일리 없어. 살이 안빠졌자나! 였다. 좀 웃프지만 한번 찌고 나니 빠질 기미가 없어 골치덩어리인 살도 이런 식으로 위안이 될때가 있으니, 역시 모든 일엔 명암이 있다. (참고로 오늘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내 예상대로 암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기 저기 안좋은데가 많아서 썩 기분이 좋지는 못하다. 이런 몹쓸 말을 하면 안되는 거지만, 차라리 암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러면 내가 바로 휴직에 들어가도 아무도 뭐라하지 못할테니까, 무엇보다 나 스스로.)
며칠은 병가를 냈지만 요즘 회사가 워낙 바빠서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직장인은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는 처지. 안좋은 몸으로 밀린 일을 처리하는데 어찌나 힘이 들던지 "로또 돼서 아플땐 그냥 맘껏 아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더니 내 말을 들은 후배가 불쌍하단다. 로또 돼서 좋은 걸 하겠다는 게 아니라 "마음 편히 아프겠다"니 안쓰럽다고. 하지만 진심인 걸. 이주고 삼주고 출근 걱정 없이 푹 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근데 로또 돼서 회사 관두면 아플 일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 같다ㅎㅎ
아참, 위에선 살이 안빠져 암이 아닐거라고 생각했다고 했지만 이번에 아프면서 3kg 정도 살이 빠지긴 빠졌다. 순전히 입맛이 없었던 덕이다. 아픈 건 짜증나지만 늘 왕성하던 식욕이 줄어든 건 좀 반가웠다. 근데 입맛이 없었던 것 치고는 별로 안빠진 편, 일단 계속 누워 있느라 식욕이 줄어든 것 만큼 활동도 줄었고, 어차피 약 먹느라 입맛이 있건 없건 세끼를 꼬박 챙겨먹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입맛이 다시 되살아나는 중인데, 몸이 회복되는 신호로 보고 반가워해야겠지만 아주 반갑지만은 않다. 기왕이면 살이 좀 더 빠지고 식욕이 돌아오면 안될까?;; 여전히 철이 없다.
그리고... 항생제 감수성 검사 결과 대부분의 항생제에 내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충공깽. 정말 충격이 컸다. 이 검사는 하는지도 몰랐는데 그렇단다. 의사 선생님이 특정 항생제를 가르키며 이건 거의 수퍼 박테리아에 대항하기 힘들 수준이라는데(이게 정확한 표현인진 모르겠지만 여튼), 그간 온갖 염증들에 약을 먹어도 먹어도 차도가 없던 건 암 같은 기저질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엔간한 항생제에는 죄다 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안먹었던 항생제여도 교차내성이란게 또 있다고...). 내가 남들보다 항생제를 많이 먹긴 먹었지. 그런데 앞으론 어찌 산다? 정말 난감하다. 너무 난감하다. 의료계 지인들에게 물어봤더니 항생제 내성은 안없어지는 거라 면역력을 높여서 최대한 안아파야 된다는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우면 내가 평생 골골거리겠냐는... 말로만 듣던, "가벼운 교통사고로 병원 입원했다 병원에서 수퍼 박테리아 감염되어 급사망"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짜증이 난다. 평소에 신변 정리를 잘 해둬야겠다. 이거야 걍 농담 섞어 하는 말이고 설마 거기까지 가진 않겠지만 여기 저기 아파 항생제를 자주 복용해왔는데 이젠 뭘로 버티나... 그리고 이젠 병원에 갈때마다 항생제 내성 리스트를 들고 다녀야하는 건가? 흥칫뿡
아무튼 지난 한달간 병균에는 효과도 없는 항생제를 장기간 복용해오며 괜히 유익균만 죽여 면역력이 바닥난 사태에 대해 깊은 아쉬움이 든다. 정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요즘 회사생활은 폭주하는 기관차같다. 하지만 이 많은 이유들에도 불구하고(심지어 이젠 부모님도 회사를 좀 쉬라는데!!!) 쉽게 뛰어내릴 수가 없다.
참, 이 와중에도 나는 지난 여행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있다. 얼마전에도 글을 쓴 것처럼 이전 유럽 여행들과는 다르게 현지인들의 불친절에 기분이 여러번 상했고, 여행 내내 컨디션이 안좋았고(이거야 수시로 있는 일이지만), 돌아온 이후에도 한달 넘게 계속 앓기만 해서 어쩌면 이번 여행은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수도 있겠다...싶었는데 왠걸,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북이탈리아의 호수와 남프랑스의 바다와 옛 도시의 미로같은 골목들이 너무나 그립게 느껴진다. 장거리 여행의 댓가는 가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름다운 풍경들이었다. 언젠가 또다시 갈 수 있을까, 요즘같은 몸 상태로는 너무 요원하게 느껴지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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