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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불연속 세계] 중에서

mooncake 2014. 3. 2. 17:00



온다 리쿠, 불연속 세계 중 [나무지킴이 사내] p.45~46


 이른 아침의 산책길은 아직 공기가 선득했지만 걷다보니 몸이 따듯해졌다. 오늘도 흐릴 모양이다. 어째 한동안 맑은 날씨다운 맑은 날이 없었던 것 같다. 

 "도심에 이런 곳이 다 있군."

 로버트는 조용하고 수풀이 많은 산책길에 놀란 듯 했다. 

 "재미있지?"

 "과거로 이어지는 길 같아."

 주변 경치에 푹 빠진 로버트를 다몬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보았다. 이 경치를 보고 그가 과거를 연상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이 생각날 것도 아니면서."

 다몬은 짤막하게 말했다. 로버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게 꼭 그렇지도 않아. 오히려 말도 안되게 어렸을 때 일이 불현듯 생각나고 그런단 말이지. 본국에 있을 땐 그런 일이 없었어. 집에 가면 거기가 추억의 장소니까. 추억에 둘러쌓여 있는 셈이니 기억을 떠올릴 필요도 없지. 하지만 멀리 일본에 와 있으면 가령 이렇게 별로 이렇다 할 것 없는 수풀이라도, 기억 속에 있는 것하고 비슷한 점이 있으면 눈에 띄거든. 그러면 머릿속에서 찰칵하고 영사기가 켜지면서 옛날 풍경이 머릿속에 찰칵찰칵 소리와 더불어 비춰져. 지금이 바로 그래. 어렸을때 할아버지께 꾸중 듣고 정원 구석 장미나무 뒤에 숨던 게 생각나는 군."

 다몬은 흑백필름으로 무릎 기장의 반바지를 입은 어린 시절의 로버트가 정원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향수란 신기하다. 생각지도 못한 힘으로 인간을 뒤흔든다. 다몬도 로버트와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다른 나라에 있노라면 일본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이 문득 떠오르곤 했다. 게다가 상당히 선명하고 세세하게 생각나는지라, 그 순간 시간이 멎으면서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춘다. 지금의 로버트가 그랬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었다. 


온다 리쿠는 나에게 참 미묘한 작가다. 어떤 소설들은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마다 작가에 대한 애정이 솟아오를 정도로 좋아하는가하면, 또 어떤 소설들은 길을 걷다 맨홀 구멍에 잘못 빠진것마냥 불쾌한 기분이 들어 왜 이 책을 읽었는지 후회하게 된다. 아마도 온다 리쿠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미묘하게 삐뚤어진 기운이 스물스물 자신을 감싸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완성도가 낮은 소설은 그 나쁜 뒷맛을 상쇄할만한 효용을 주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읽은 이 [불연속 세계]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물론 수시로 기분이 싸~해지다가 결국은 그날밤 잠을 제대로 설쳤지만 말이다^^;;; 특히 위에 발췌한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활자화되어 있어 굉장히 반가웠다. 여행을 가면, 특히 일본에 놀러가면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 많아 그리움에 젖을때가 종종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외국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는가보다. 그러고보면 역시 여행은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것과 동시에 "내 자신 속의 무언가"를 찾아가는 작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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