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lust
분노는 나의 힘, 아니 여행의 힘 본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그간 나의 여행의 원동력은, 분노가 팔할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분노와 짜증은 대부분 회사가 준 것이다.
ㅎㅎㅎㅎ
지금 이 글에 올리는 사진들은 작년 가을 유럽 여행때 찍은 사진들이다.
여행 사진을 보면 그 순간들이 그립고 여행이 마구마구 떠나고 싶어지는데
막상 비행기표와 호텔을 검색하다보면 의욕이 사그라든다.
이코노미석에서 장시간 낑겨가는 것도 싫고,
형편없는 호텔에서 묵기도 싫다.
그렇다고 비즈니스석 타고 좋은 호텔에서 묵자면, 예산이 한도끝도 없이 올라가 여행을 포기하게 된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
예전에는 모든 걸 감수하고 떠났는데
이젠 그럴만큼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 주질 않는다.
어랏, 회사생활이 편해졌냐고?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만은, 지금도 숱한 짜증과 피곤으로 뒤범벅된 회사생활이지만, 우울한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지만,
그래도 여행으로라도 도피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았던
그런 최악의 상황은 확실히 아니다.
분노게이지는 낮아졌고
건강은 더 나빠졌고
여행을 하면 할수록 한계효용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
...
...
그럼 그냥 여행을 안가면 될 일인데,
한때 정말 사랑했던 연인에게 마음이 식고도
지난 정 때문에, 습관이 되어버려서, 때로는 연민 탓에 떠나지 못하는 그런 구질구질한 연애처럼
여행이 별로 가고 싶지 않다면서도 자꾸만 비행기표와 호텔을 검색해보고 있다.
게다가 괜히 가기 전에만 여행 준비가 귀찮네, 여행지 가서 아픈 게 싫네, 돈이 아깝네, 등등 생각이 많지
정작 여행을 가면 또 신나게 잘 돌아다닌다에 한표.
반대로 추석때 여행을 안가면 방바닥을 긁으며 "나 왜 여행 안갔냐고오오오" 절규할 모양새가 뻔하다.
그러니 어디든 가긴 가야겠는데
대체 어딜 가지...
이럴 때마다 나를 구원해준 것은 일본이었는데,
지금은 일본 간다고 말하면 최근 일어난 일련의 자연재해들 때문에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고,
(평소에도 딱히 효도하는 게 없는데 걱정이라도 사서 끼치진 말아야지)
러시아나 갈까? 했더니 아무래도 추워서 안될 것 같고,
원래 가려던대로 프리미엄이코노미 타고 바르셀로나나 갈까 했더니 가격이 너무 올라있어서 비수기의 비즈니스 뺨 때리는 가격이라 억울하고...
에고 모르겠다.
암튼 글을 쓰다보니 원래 쓰려던 방향이랑 영 달라져 버렸는데,
요약하자면
내가 그저 순수하게 낯선 세계와 모험을 좋아해서 여행을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 기저의 진정한 원동력은 분노와 현실회피가 훨씬 더 컸다는 걸 깨달아서 좀 허무하다는 것.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질척질척)
까지 어제 썼는데
오늘 회사에서 빡신 하루를 보내며 한 생각은...
아무래도 내가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나 너무 지쳐있는 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사람이 번아웃 되는 게 이렇게 무섭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던 여행마져 너무 피곤해서 떠나기 싫은 기분이 드니까.
아무래도 좀 쉬어주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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