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lust
말라카 호텔과 불평등에 대한 단상 본문
호텔 이야기이지만 호텔 리뷰는 아닌 이야기...ㅋ
말레이시아 말라카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띠끄 호텔 푸리는 내 여행 중 최대 멘붕을 안겨준 호텔이다.
예전부터 블로그에 들려주시는 분들은 이미 몇번 들으신 내용이지만, 내 여행 역사상 난생 처음으로 호텔 푸리의 객실에서 벌레를 마주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말 커다란 까만 벌레였다. 왠만한 바퀴벌레보다 훨씬훨씬훨씬 더 컸다. 사람들은 "혹시 엄청 큰 동남아 바퀴벌레 아니였을까?ㅋㅋㅋ"라고 놀리는데 바퀴벌레치곤 좀 둔하고 느렸다는 게 유일한 위안 거리다. 여튼 난 정말 놀랐다. 그런데 호텔측에선 방에서 커다란 벌레가 나온 게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프론트 데스크 직원의 대응이 너무나 미적지근했다. 워낙 벌레 공포증이 심한 나는, 결국 프론트 데스크에서 미친 여자처럼 항의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남자직원 두 명이 투입되어 20분만에 간신히 벌레 검거에 성공. 침대 밑에서 벌레가 나오자 그들도 벌레를 보고 나와 똑같이 비명을 꺅꺅 질렀다!ㅠㅠ 또다시 벌레가 나오거나 남아 있는 벌레가 있을까 두려워 방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으나 불친절한 프론트 직원께서 말하시기를 "네 방은 디럭스룸(=제일 싼 방)인데 그 방들은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절대 안됨"이다. 쳇.
그때 몸이 너무 안좋아서 재미난 말라카 야시장을 뒤로 하고 쉬러 들어간거였는데 벌레가 나왔으니 멘붕 또 멘붕. 그래 뭐, 좀 양보해서 열대 지역에 있는 호텔이니 벌레가 나올 수 있다 치자. 적어도 조치는 빨리 취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근데 호텔 푸리의 데스크 직원은 미안해하지도, 또 내가 두번이나 로비에 내려가 난리치기 전까지는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호텔 푸리는"역사와 전통을 지닌 정말 좋은 호텔"이라는 자부심을 넘어선 자만심과 말레이시아 사람 특유의 느긋함이 합쳐져 최악의 접객 서비스를 보여주었다. 소음때문에 시끄러워 잠을 이룰 수 없었던 호치민 호텔에 이어, 말라카 호텔에선 벌레가 나오자, 여행지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가급적이면 '로컬 호텔'을 이용해야겠다는 결심도 사그라들었다. 이러니깐 표준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프랜차이즈 호텔을 이용하게 되는 거 아니겠수.
게다가 로컬 호텔 이용이 정말로 현지인에게 도움이 되는지도 좀 의문인 것이, 결국은 로컬 호텔을 운영하는 "부자" 몇몇에게만 도움이 되고, 글로벌 호텔이든 로컬 호텔이든 결국 호텔 고용인이나 현지 거래처가 버는 돈은 결국 같지 않으냔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호텔 복도에서 마주친 한 청소부 할머니 때문이다.
보통 낮엔 호텔에 잘 있지 않으니 복도를 청소하는 청소부와 마주치는 일은 꽤나 드문 일이다.
주변을 돌아다니다 뭔가 방에 있는 물건이 필요해서 호텔로 다시 들어갔던 것 같은데 내 방으로 가기 위해 긴 복도를 따라 걷다보니 내 앞쪽으로 계단을 청소하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한쪽발에 붕대같은 것이 감겨 있어 "아이구, 저런 발로 청소를.. 힘드시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청소부와 지나치던 중 가볍게 인사를 했는데 그분이 깜짝 놀라시며, "마담, 너무너무 죄송해요"라고 몇번이나 사과를 하시는 게 아닌가.
아마도 본인이 청소를 하느라 길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데 몸을 절반으로 접다시피 옹송그리며 연거푸 사과를 하는 모습이, 마치 대역죄라도 지은 듯 사과하시길래 내가 오히려 더 어쩔 줄은 몰라서, 길 막으신 거 아니라고, 괜찮다고 얘기드리고 황급히 호텔방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설혹 그 분이 청소를 하느라 내 길을 막았더래도 그게 그렇게 온몸으로 사죄를 할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발에 감긴 붕대, 초라한 입성과 어쩔 줄 몰라하며 사죄하던 그 분의 모습이 떠오르면 지금도 마음이 참 아프다. 나도 너무 놀라서 도망치듯 호텔방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팁이라도 두둑이 드리고 올 걸 그랬다 (근데 복도 청소하고 있는데 팁 드리는 것도 이상하잖아...ㅠㅠ)
새삼, 모르진 않았지만 모른척 하고 있었던 "어떤 진실"이 피부로 느껴져 견딜 수 없을만큼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저렴한 가격으로 즐기고 있었던 물건이나 서비스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오래전에, 맥도날드 해피밀 장난감을 갖고 노는 선진국의 아이들과 공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해피밀 장난감을 생산해내는 동남아의 아이들을 대조해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그 후에도 나 혼자 해피밀을 안산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진 않잖아,라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해가며 계속 해피밀을 구입해 오고 있지만, 내가 SPA 브랜드에서 저렴하게 사입는 옷이, 내가 사먹는 초컬릿에 들어간 코코아가, 내가 동남아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즐기는 호텔의 서비스에 "타인의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고된 노동"이 들어가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난 그것도 정말 모르겠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내내 고민하고 있지만, 기껏해봤자 공정무역 커피나 공정무역 초컬릿 같은 작디 작은 것 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게다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곳에서 타인에 대한 착취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OECD의 부속기구 중 하나인 Anti-Slavery International에 따르면 대우 인터내셔널이 우즈베키스탄에서 "미성년의 강제노역을 통해 면화가 생산되고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지 사업을 강행하고 있으며, 대우 인터내셔널의 지배주주인 포스코 역시 이러한 사실을 묵과하고 있다고 한다(ㅠㅠ) 이 경우 나 혼자 대우 인터내셔널이나 포스코에 항의를 하거나 불매를 한다고 달라질 게 있을리 만무하며 사실상 불매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여튼 뾰족한 답은 보이지 않지만, 애초에 가능할 것 같지도 않지만... 계속 고민해볼 문제다.
그나저나 푸리 호텔에서 벌레를 잡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말레이계 아저씨 한분은, 내가 벌레를 보며 빨리 잡아달라고 소리를 꽦꽥 질렀는데도 내가 얄밉지도 않았던지ㅋ 이후로 호텔에서 마주칠때마다 나를 보면 항상 엄청 반가워하며 씨익 웃으셨다ㅎㅎㅎㅎ 참 성격 좋은 아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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